올해도 이럴줄 알았다.
by 파동과입자 ㆍ 2017/11/05 10:38


올해도 이럴줄 알았다.


작년 말,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수첩을 살 때만 하더라도 올 한해 많은 것을 기록해 보자며, ‘올해는 작년과는 다르다’며, 큰마음 먹었는데. 기억 속에 잠시 잊혔었나보다. 주르륵 훑어보기 시작하니, 올해 11월이 넘어가는 지금, 일사분기의 기록에서 멈춰버렸다. 그때는 뭐가 그리 욕심은 많았는지, 나름대로 하고 싶은 리스트를 쭉 적어 놓고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문단 맨 앞에 체크 표시나 가운뎃줄을 그어나가며 표식을 해두기로 했다.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하나씩 아래에 추가하기도 하고, 한 번에 달성하기 힘든 일은 여러 개의 단계로 나누어 하나씩 달성하기로 했다.


올해는 책 몇 권 읽기.
언제까지 ○○○하기
언제까지 ○○○달성하기.
언제까지 ○○○만들어 보기.
어느 어느 나라 여행해보기.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조금 더 나아지는 내 모습을 기대했다. 밑줄이 늘어날수록, 체크표시가 늘어날수록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다가갈 줄로만 알았다. 몇 년을 속았다. 그걸 알면서도 올해는 정말 다를 줄 알았다. 그래도 나름 달성해 보려는 노력의 흔적이 있었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실행 계획을 나름 치밀하게 세우고, 달성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행동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었다.

욕심이 늘어날수록 해야 할 일은 쌓이면서 진척도는 더뎌가기만 했다. 노트 한켠에 적어놓은 리스트보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 더 많아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제풀에 지쳐버린다. 수첩을 펼칠 때마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왔지’라며 씁쓸해했다. 역시 난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야 수첩을 덮어버리고야 만다. 내 수첩은 분명 1년이라는 보증기간이 있음에도 유효 기간은 조기에 만료된다.

밑줄 하나 없이 깨끗한 다이어리를 보면서 왜 이렇게 나 자신이 싫어지는 건지. 내가 뭐 그렇지. 올해도 그렇게 흘러만 가는 거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보자며 수학의 정석의 "집합과 명제" 부분만 열심히 봤던 학창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처음만 열심히 계획 세우고, 이루어 낸 결과물은 하나 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이유 없이 먹어버린 숫자가 가슴을 쿡쿡 후벼 파기 시작한다. 이렇게 살다가 죽겠지. 올해도 별다를 것 없었으니, 내년도 별일 없을 것이다. 그저 그런 인생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날들.

생각해보니, 해야 할 리스트를 다 이룬다고 해도 내 인생이 급격하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 아닐까.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무언가를 다 이룬다고 해서 바뀔 인생이었으면, 지난 살아온 시간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왜 그동안 바꾸지 못했는지 라며. 여전히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일하는 것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하고, 밥보다는 간식을 더 많이 먹으며, 술 마시다 늦게 귀가해서 항상 혼나는 삶을 지속하겠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찾아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해야 할 일을 다 이룬다고 해도 크게 바뀌지 못할 인생이라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고 고통받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다독여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상대방을 향해 비난하지 않기.
불필요한 기사 클릭하지 말고, 댓글에 감정 쏟지 말기.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게 관여하지 않기.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괜히 시비 걸지 않기.
우월함이나 자만감은 생각하지 않기.
내가 하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기.

등등 말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 불필요하게 노트를 보며 고민할 필요도 없고.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불안감에 떨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멍하니 하늘도 한번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 산책하러 가기도 하고, 시침 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하나씩 세어보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의 양이 늘어나도 크게 부담도 없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되려 나 자신을 반성할 방법의 가짓수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하니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 되었다.

불필요한 부담감을 덜어내고 나니 내면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발전에 대한 조급함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첩을 펼치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고, 수첩을 보며 하루의 행동을 반성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필요한 노력으로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온전한 생활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는지 등등.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나둘씩 지워나가며 체득하게 되니 언젠가는 내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생겼다. 내 인생의 불필요한 영역을 떼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두 달여도 채 남지 않은 올해. 내년에 사용할 다이어리를 또다시 사야 할 것만 같다. 올해는 ‘정말정말’ 다르다며, 작년에 내가 했던 행동 그대로 말이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첫 페이지는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를 적어놓아야겠다. 지속해서 환기시키고 업데이트를 통해 나는 격렬하고 지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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