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팩에 만원
by 파동과입자 ㆍ 2024/05/0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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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잔뜩 취해 숙취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술김에 썼던 일기를 지우는 일이었다.


내일이 오는 건 참지 못했다.
그래서 마셨다.
술에 취해 떨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싸구려 술로 취해야 나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면 더더욱 좋았다.
막사는 거 같아서 좋았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어쭙잖게 살아가는 모습을
대변해 주는 거 같아서 좋았다.
합리화며 핑계며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기 좋았다.


이러지 말아야지, 다시는 과음하지 말아야지.
단기 기억 상실증 걸린 사람마냥 그날 저녁 술 마시는 모습이 좋았다.
되지도 않는 몇 글자 끄적이고 나서 아침을 맞이할 때,
괜한 객기 같은 것들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니.
적당하게, 그럭저럭 타협하고, 대충 얼버무리듯 하루를 정리하고,
안줏거리를 대신할 세 팩에 만 원짜리 반찬을 사러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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