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없음
by 파동과입자 ㆍ 2017/10/28 08:31
"
이별의 순간에서 가장 슬픈 것은
내가 상대방을 향해 어떠한 행동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며,
어떠한 말과 감정조차 허락되지 않음을 깨닫는 그 순간.


시간이 약이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 내버려 둔 채로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기. 이게 말은 참 쉬운데, 왜 이렇게 내 마음과는 다르게 힘든 건지 모르겠다. 밤늦게 술 마시다 보면 왜 그렇게 생각이 나던지. 계절이 지나가는 순간순간을 느끼게 되면서 아쉬움은 왜 그렇게 짙어지는 걸까. 핸드폰에서 지워버린 전화번호는 왜 그렇게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린 건지. 잘 지내고 있을까. 어디 아픈지는 아닐까. 가끔씩 거닐던 공원, 종종 들르던 카페를 지날 때마다, 덜컹덜컹 내려앉는 기분. 연락 한번 해볼까. 말까. 그래 이번만 참자. 이번 한 번만.

살아오면서 느끼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하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다가,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미쳤지'로 결론이 나버리고야 만다. 어떤 선택지가 나에게 주어진 이상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택하거나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느껴서일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문제를 부정하고 있거나 혹은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별의 아픔을 인식해버리는 순간, 더 이상 그 순간은 연속선상에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단절된 시간이고, 단절된 시간은 또 하나의 문제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문제가 생기게 되면 한 번의 선택을 해야만 했었고 또 한 번의 결정을 해야했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고 지연시켰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찾아오는 아픔. 쓰라림. 나는 또 한 번의 갱신을 해야만 했다. 어떠한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더욱더 또렷하게만 다가온다. 한 번의 잘못된 행동으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참고 또 참는다.

선택의 문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이라는 선택지를 넣어 두기로 했다. 학창 시절 시험 볼 때 가끔 선택지를 만들다 도무지 만들 선택지가 없어 마지막 5번은 "정답 없음"이라고 만들었던 선생님의 심정처럼. 마지막 선택지는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때로는 그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너무 많은 선택지에서 방황한다면 단순하게 마지막을 선택하면 되니까. 그러한 선택지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이나, 혹은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의무감을 가진 사람보다는 조금 편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마지막 번호를 선택하는 횟수가 누적되어 갈수록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는 날이 줄어들 테니까. 아픔을 조금씩 마주할 수 있으니까. 그런 시간이 모이고 모여, 문제를 문제처럼 인식하지 않는 그 단계에까지 왔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지속적으로 인식되는 많은 문제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게 그저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 중이다. 대부분의 문제의 해답을 일관되게 5번으로 계속 방어 중이다. 그래도,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된다면 선택의 문제 속에서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새삼 느끼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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