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을 샀다
by 파동과입자 ㆍ 2017/11/17 22:51


이 숫자가 그 숫자다

로또를 사고 나오는 순간만큼은 1등이다. 이 숫자가 그 숫자다. 확신에 찬 얼굴로 편의점을 나온다. 내가 고작 여섯 개 숫자도 맞추지 못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아 괜스레 억울해졌다. 고작 숫자 여섯 개 때문에. 이 로또만 되면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 편의점을 나오는 순간부터 1등이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 한 50억 정도 들어오나. 낡은 집부터 이사해야겠지. 차도 바꾸고, 부모님도 조금 드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 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들고 있는 종이가 휴짓조각으로 바뀌게 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 나뿐만 아니라 방금 나간 중년 아저씨도, 지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조차도 모두 다 알겠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로또를 사는 이유는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게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싫고, 변화는 해야 하는데, 무언가 확 체감할만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하기는 싫고. 노력은 해봐야 어차피 안될 거라는 걸, 그러고서는 확신에 찬 결심. 그래 이것밖에 없다.

토요일 저녁,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현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만 이렇게 사는 것만 같아 억울했다. 다들 잘 먹고 잘사는 것만 같은데 왜 나만 먹고 싶은 걸 못 먹고, 사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만 담아야 하는지 속상해 죽겠다.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보니 한숨이 푹푹 쉬어진다. 분명 지난주에 월급날이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졸라맨다고 졸라맸는데도 말이다.

잠깐의 희망, 그거면 딱 천 원어치였다.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보상을 받기 원했다. ‘나 정도면 열심히 살았어. 받을 가치가 있어’라며 도달하지도 못한 미래를 현재 시점으로 끄집어내려 지금의 모습을 합리화를 시켜버린다. 천 원어치의 희망은 단순히 천 원만큼의 기대감이면 충분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지금이 현실이다. 그 이상의 꾸는 꿈은 꿈이 아니라 욕망이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 인분의 시간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래도 살아야만 했다. 주어진 만큼은 살아야 하기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 속상하기도 하고, 더디게 발전하는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뭐 어쩔 수 있나, 그래도 살아야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나에게 주어는 시간을 버릴 수는 없으니.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은 행동부터, 말도 안 되는 실천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일확천금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돈이라도 한 푼, 두 푼 아껴서 저축해서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내 능력에 실망하기보다는 그래도 책 한 글자라도 읽어보는 편이 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낫지 않을까. 물론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루의 시간이 모이고 모여 어느 순간 뒤돌아봤을 때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노력은 과연 가치 없는 일이 되는 것일까.

비현실적인 내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무언가 바뀌고, 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복권 당첨 만큼 말도 안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현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잘살고 있는 단편의 모습을 전부인 것처럼 이상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과의 비교를 통해 위축되는 삶이야말로 어리석은 행동 아닐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오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되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어쩌면 정말 잘된 일이라고, 내일의 내 삶은 누군가에 의해서 생성되거나, 모방되는 것이 아닌, 나에 의해 조금씩 만들어 가야만 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현재의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더라고,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당첨되지 못해 버려진 종이 쪼가리 같은 삶에 실망하기보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천 원어치의 희망이라도 안고 살아가는 삶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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